가난은 어마어마한 부 앞에서 오히려 당당하다.
어차피 비교 될수 없는 다른 세상이기 때문에.
가난이 정말 부끄러워 질때는 성실함 앞에서이다.
한푼두푼 모아 나만의 작은 성을 꾸린 보통 서민들의 성실함과 겸손함 앞에 가난의 게으름과 오만함이 벌거벗겨진 것 같아 너무너무 부끄럽다.
내 마음까지 가난한 것 같아서.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느냐 어떤 존재가 되느냐 어떤  인간으로 사느냐라는 관점에서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걸 느낀다. 이것은 내가원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내가 되고자했던 존재가 아니다. 나는 언제 원하는 존재였던 적이 있는가? 틀리고 잘못된 것은 이미 완성이다. 하지만 이것을 미완성이라고, 완성을 위한 과정이라고 오해하고 살았으니 미련하고 무지한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더해진다.
삶이란 호흡이 아주 가쁘고 시간은 매정하기 그지없어 매 순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어느새 길에서 벗어나 가시덩쿨 엉망진창 가운데 서 있다. 팔다리를 옥죄고 있는 날카로운 넝쿨을 하나씩 뜯어내는  고통스러운 시간의 반복이 지금까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이젠 이 고통이 너무 친근함과 동시에 지긋지긋하다. 어째서 이런 고통이 날카롭게 후벼파 고통이 느껴질때야 비로소 살아있음을 자각하게 되는가. 이렇게 미련한지도 모르고. 행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찰나이고 과대포장된 희망사항일뿐, 고통이 심장과 뇌를 후벼파고 고약한 냄새를 풍길때야 진정 살아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눈을 뜨고 사물을 보고, 마지못해 잠이들고 뇌의 세포 하나하나가 의미없는 번민을 위해서 조각나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수 있단 말이다.
가시넝쿨에 가진것 모두 갈기갈기 찢겨져 버리고 남은것은 생명만은 붙어있는 초라한 삶 하나지만, 더이상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아무런 움직임 없이 이대로 갇혀버릴텐가, 덩쿨을 뜯어내고 상처와 피범벅인 채로 다시 바른길 위에 올라설텐가. 하지만 누구도 지금 뜯어내는 것이 나쁜 가시덩쿨인지 콩나무 줄기인지 가르쳐주지 않고 분간할수도 없다. 다시 올라선 길이 낭떠러지를 향하는 것인지 영원히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것인지 알수 없다. 내 몸은 다시 만신창이가 되고 피투성이로 길 위에 올라서겠지만 언젠가 상처는 아물겠지. 그 동안에도 삶을 이 지경으로 내몬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책에 또 괴롭겠지.
어떤 것을 소유하고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느냐에 실패한 댓가는 쓰다.

그래 나도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서 kfc비스킷을 두 개나 먹어치우는 내 모습이 썩 자랑스럽지는 않아. 하지만 생각해봐. 지난날 어리고 경험없고 미숙하고 무식하고 심지어 이렇게 맛있는 비스킷의 존재조차 몰랐을 정도로 멍청했던 그 시절을 말이야! 그때 비하면 난 정말 용된거지. 그때보다 더 세련되지고, 더 많은 사람을 알고,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더 많은 책을 읽었지. 이건 정말 장족의 발전이야. 어릴때가 좋아 보이는 건 단지 그때로 되돌아 갈 수가 없기 때문인거지, 실제로 지금의 나와 다각도로 비교해 보았을 때 그 시절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실질적인 증거는 없어. 물론 신체적인 조건은 그때가 더 나았을 수도 있어. 하지만 처녀시절의 나와 비교할때는 또 말이 달라지지. 섹스해본 지금의 내가 훨씬더 우월해. 이것봐, 날 믿으라고. 섹스는 많이 하면 할 수록 좋은거야. 처녀라고 좋을건 하나도 없다고. 날 믿어. 진짜라니까. 아무튼 이런 실제적인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지면 나아졌지 더 구려지지는 않아. 여드름 나고 꼬질꼬질한 교복을 입고 있던 너와 지금의 너를 비교해봐.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어. 하루하루 지날수록 경험이 많아져서 어쩔 수 없이 어제보다 나은 인간이 되어버린다니까. 이 당연한걸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앞날을 걱정하고 낙담하고 스스로의 인생을 비참하게 파멸시키면서 사는거야. 다시 한 번 명심하라고.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지면 나아졌지 더 구려지지는 않아.

시크한 빠리지앵, 행동하는 젊은 지식인, 끝내주게 잘노는 화끈한 청담동 패션피플, 철학과 인문을 넘나들며 트렌드를 이야기하는 기자, 때로는 예술가, 진보적인 정치사상, 대중적이지 않은 음악과 예술과 영화, 과거의 훌륭한 아티스트들을 회자해주는 의리, 독립, 예술, 청춘, 순수, 인디, 진보, 트렌드, 경도, 그들만의 왕국. 문화를 부흥시키고, 청춘들의 독립을 응원하고, 거지같은 현실을 아름다운 시로 위장하고 위로하기 위해 참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런데 이제 그런 멋있는거 못하겠다. 청춘 예찬도 지긋지긋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서 밥벌이도 제대로 못하면서 독립이니 순수니 외치는 사람들도 지긋지긋하고, 엄청난 혁신이니 실험이니 하지만 결국 그나물에 그 밥인 닳고 닳은 크리에이터들도 지루하고, 거기에 종이낭비, 뜬구름 잡는 소리, 탁상공론밖에 안되는 기사 몇줄 써놓고서는 예술과 문화에 기여라도 한 듯 으쓱해지는 내 꼴이 한심하고 천박해서 못해먹겠다. 

이제 그냥 재미있는 것, 유용한 것, 편안한 것, 쉬운 것이 좋아. 

나는 이미 인생의 몇몇 개인적인 부분에서 매우 비겁하게 살고 있어서 일할때 만큼은 안그러려고 노력하는데, 그래서 비겁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참을 수가 없다. 특히 웬만큼 나이도 있고 사리분별 가능한 사람들이 비겁하게 굴고, 남에게 자신이 할 일을 떠넘기는 걸 보면 마구 짓밟아서, 그 나이 먹어서 어린 애들한테 욕이나 들어먹는 인생 헛산 한심한 인간으로 스스로 비하해 자신의 지난 인생을 뒤돌아보고 그동안의 모든 시간이 헛된 것임을, 그리고 그의 인생은 이미 실패한 것임을 깨닫게 해주고 싶다.

이젠 마치 친오빠같은 그를 오랫만에 만나서 밥을 먹는데, 그가 나에게 “너 마치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는 사람같아.”라고 이야기 했다.
나는 중년의 위기는 아니지만, 이제 더이상 ‘어린 나이에 뭘 했구나!’ 라는 말을 들을 수 없는 나이가 된 게 슬프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 벌써 기자구나, 어린 나이에 경력도 많고, 어린 나이에 이런 일도 하는구나.”라는 말이 나에게 그동안 참 기분좋고 힘이 되는 말이었던것 같아 라고 이야기 했다.
그런데 어느날 이제 더이상 어린 나이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자, 걷잡을 수 없는 상실감이 몰려왔다고, 그게 아마 서른 되던 때였던 것 같다.
지금 사람들에게 듣는 “어린 나이에 편집장이 되셨군요!”가 내가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는 ‘어린 나이’에 대한 감탄이고,
그리고 어쩌면 편집장으로 오겠다고 결정한 것도 ‘어린 나이’에 뭔가를 하겠다는 마지막 발악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이야기 했다.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했더니,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그런 말이 그냥 익숙해졌던 것 같아.”
“그럼 앞으로 너의 계획은 뭔데? 더이상 어린 나이가 아니라면?”
“음… ‘(이러고 다니기에는)생각보다 나이가 많으시네요’, ‘나이가 몇인데 이러고 다니냐’ 뭐 그런 말을 들어야겠지…?”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